[스크랩] 부산의 대중음악.. 연재를 시작하면서/ 남인수-울며 헤진 부산항(1940)

2016. 9. 5. 18:49자유게시판

부산의 대중음악

-영도다리에서 부산항까지, 부산사람들과 함께 한 부산의 대중음악


연재를 시작하면서


올해도 어느덧 9월이 되니 아무래도 이젠 슬슬~ 마무리 준비를 해 갈무리를 잘해야만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벌써 1년.., 새삼 세월이 참 빠르게 간다는 느낌이 드는 게 ‘정말 친했던 어떤 한 사람을 보지 못하고 지낸 세월’이 벌써 그렇게 됐다는 생각이 막 들 때일 겁니다.

2015년 9월 12일,

故 김종욱 형이 몹쓸 폐암으로 세상을 뜬지 1년 만에 다시 맞는 이 좋은 9월에, 저는 지금까지 釜山사람으로 살아오면서 들었던 노래와 사연들을 故人과 함께 어쩌다 저도 한번 씩 참여한, 肉筆로 기록한 내용대로 오늘부터 연재할 생각입니다..

관심과 격려를 부탁드리며 원래 연재를 끝낼 때 적어야 하는 발문(跋文)을 미리 당겨적습니다.


1980년 그해의 저는 사회에 막 발을 들여놓은 직장생활 1년 차, 이른바 ‘사회초년생’이었습니다.

고향인 蔚山 蔚州를 떠나 중학생 때인 1968년에 釜山으로 내려온 저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 시절과 군복무 기간 동안 잠시 외지에서 지낸 것을 제외하고는, 이제 막 시작하는 某 大企業에서의 직장생활도 다시 釜山에서 하게 된 그해 8월의 어느 날입니다.

제가 적(籍)을 두고 있는 회사가 있던 동구 초량동에서 부산역을 거쳐 영주동시장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어떤 조그만 전화판매상 안의 유리창에 알록달록 수 십장의 SP, 10인치LP레코드가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게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순간 머리가 하해지고 심장이 쿵쿵~ 두근두근 큰 고동소리가 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도 그를 것이 저는 중학교 2학년이 되던 69년 그해부터 참고서 살 돈과 용돈을 아껴, 갖고싶은 흔히 말하는 컴필레이션, 옴니버스, 해적음반.., 양판(洋板)들과 일부 클래식, 포크음반들을 사 모으기 시작해 이후 한해도 거르지 않고 수집에 열중해 있었을 만큼 레코드, 고서적 수집광이었으니까요..


그날 이후로 서로 같은 취미로 의기투합한 呼兄呼弟 사이로 맺어진 故人과 저와의 관계는 서로 알고 지낸 36년 세월의 길이만큼이나 참 사연도 많은 사이였지만, 초기 때의 ‘서로 죽이 잘 맞던’ 시절과는 달리 중후반기에는 애써 외면하기도 했던, 사실 敬而遠之의 시기를 겪기도 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노래로 맺어진 끈끈한 사이였지만, 그이가 천착(穿鑿)하는 분야와 제가 추구하는 음악관이 왕왕 상충할 때가 있어 그렇게 빚어진 일이었는데, 그만큼 故人의 自己音樂觀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 하나는 무결점, 보정(補正)없이 완강하였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방증이었기에 말입니다.

‘전통대중가요의 정통성 지향에 관한 일에는 전혀 타협할 줄 몰랐던 꼬장꼬장한 옹고집 외골수’...

아마도 그를 기억하는 대다수의 知人들이 하는 말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이의 이러한 타협하지 않는 행동들 때문에 是非가 투렷해 그가 肉筆로 쓴 노래評은 지금까지 나온 그 누구의 사료보다도 더 사실적이며 정확합니다. (원로가수나 작사가 작곡가인 당사자가 이야기하는 것이라도 꼭 검증을 거쳤으니 그의 글로 적은 歌謠史는 거의 팩트에 가깝습니다)

-한 個人의 삶은 그 사람이 살아온 時代를 투영(透映)하는 살아있는 歷史이다- 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故 김종욱 형이 살아생전 남긴 그의 遺作이 된 [부산의 대중음악]은 남아있는 우리들에게 참으로 소중하고 귀한 정보들을 줍니다.


[부산의 대중음악]에서 소개하고 있는 모든 노래를 ‘冊子에 실린 原文 그대로 노래와 함께 순서대로’ 올리는 일...

이제부터 제가 맡아서 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이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크게 걱정되는 것은, 故人이 남기고 간 자료들을 제가 모두 수습하지 못한 탓으로 제가 가지고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만 이 방대한 일을 해야 하니 혹시나 내용이 빈약해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군요.

(이 모자람을 채워주실 분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어차피 작년부터 진작해야 했을 이 작업을 지금까지 미뤄온 첫 번 째 원인이었기도 했으니까요...)



1939년 세계 제2차 대전이 발발해 일제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을 강제동원해 전쟁터로 내몰았다.

이에 불복하는 뜻있는 젊은이들은 만주로, 상해로, 또는 일본으로 피신을 했다.

1940년 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가 부른 노래 <울며 헤진 부산항>은 당시의 이별상을 대변한 노래이다.



김종욱(1949~2015)


대중음악연구가이자 옛날가요보존회 회장으로 1979년부터 평생을 바쳐 사라져가는 우리 대중음악을 발굴하고 수집했다.

이렇게 수집된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2012년 (부산)국제신문에 ‘김종욱의 부산가요이야기’를 연재하고 포털사이트 네이버 카페 ‘옛날노래보존회(cafe.naver.com/chonguk49)를 만들어 운영하는 등 우리 가요를 널리 알려왔다.

저서로 2014년 부산발전원구원에서 발간한 부산학 교양총서 <부산의 노래, 노래 속의 부산>(공저)이 있다.

평생을 바쳐 발굴하고 수집한 한국대중가요의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단행본으로 출간하기 위한 준비를 하던 중 2015년 9월,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 이 책은 고인의 유작이 되었다. -펴낸 곳 호밀밭-


출처 : 故鄕母情, 옛날양판 오리지널音盤을 틀다
글쓴이 : 故鄕母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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